송촌동 송씨삼세효자정려구허비
- 전시일정 : 상시
- 전시관 : 효문화체험관
- 등록일 : 21-06-2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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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촌동에의 동춘당 공원 내부에 위치한 삼대효자정려의 옛터이다. 송경창은 1608년(선조 41)년, 송경창의 손자인 송시승은 1684년(숙종 10)년, 송시승의 아들인 송유관은 1684년(숙종 10)에 정려가 내렸다.
송경창(1541~1592)은 임진왜란에 아버지 송응수를 모시고 피난을 가는 중 왜구를 만나게 되었다. 하인들은 다 달아났고 송경창만이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 81세라 걷지 못하셔서 경창이 아버지와 함께 살려달라고 애걸해 왜구들은 그냥 지나치려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왜구를 꾸짖자 화가나 칼을 들어 죽이고자 하였다. 그 칼을 송경창이 몸으로 막아 오른손이 잘렸어도 굴하지 않고 계속 아버지를 지켰다. 결국 송경창을 먼저 죽이고 송응수도 죽음에 이르렀다. 이 사실이 후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지고 「삼강행실도」에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송시승(1583~1661)은 그의 부친 송계록이 사경에 있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아버지에게 드려 수명을 연장시켰다. 그럼에도 돌아가시자 매장할 시기가 지났음에도 차마 매장하지 못하였고 여름에는 습한 자리, 겨울에는 추운 자리에 지내며 3년간 죽만 먹었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계시자 매일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프기를 기도하였다. 결국 돌아가시자 매일 한움큼도 안 되는 좁쌀죽만 먹었고 소금이나 장, 채소와 과실도 먹지 않았다. 간혹 쌀죽을 올리면 물리고 먹지 않았다. 자신이 천연두에 걸려 사경에 이르렀어도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사 음식은 자신이 직접 받들었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 쌀뒤주가 비는 일이 종종 있었으나 제사 음식만큼은 풍족하게 준비하여 제사를 모셨다.
송유관(1627~1663)은 12세 때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돌아가시자 혼자 예를 다하여 상을 모셨다. 상을 모시는 중에 일가 어른들이 안쓰러워 음식을 권하였으나 양념된 음식은 먹지 않았다. 후에 어머니가 병에 걸리시자 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드렸다. 그럼에도 돌아가시자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상복을 벗지 않았다. 하루에 두 번씩 좁쌀죽만 먹으며 슬퍼하다가 두 눈이 멀고 결국 상기를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후에 송유관의 아들인 송후겸이 상소하여 효행은 인정받았으나 정려는 받지 못한 것을 조정에 알리니 두 분이 함께 정려를 받았다.
송씨 삼세 효자정려는 현재 공주 은용리에 건립되어 있으나 본래는 대덕구 송촌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철종 12(1861년)에 정문을 대화동으로 이전하였는데 이곳이 공업단지로 개발되자 1977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주 장기면 은용리로 이전하였고 정문이 있던 자리에 송씨삼세효자정려구허비를 세워 정문이 처음 있었던 자리를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송촌동도 개발되어 동춘당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참고자료>
대전광역시, 「대전사료총서(叢書) 제11집(輯) 대전시사자료집 Ⅲ」 연산군일기 ~ 숙종실록 편, 2008
대전광역시, 「대전사료총서(叢書) 제12집(輯) 대전시사자료집 Ⅳ」 경종실록 ~ 순종실록 편, 2009
유성문화원, 「선비고을 유성이야기」, 송백헌, 김용관, 2010
대전광역시, 「2015 대전의 역사와 문화재 제6집 덕(德)을 품은 대전」-비지정 유교 문화재, 2015
大田廣域市, 「大田의 忠ㆍ孝ㆍ烈 旌閭誌」, 大田廣域市史編纂委員會,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