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룡동 여흥 민씨 정려각
- 전시일정 : 상시
- 전시관 : 효문화체험관
- 등록일 : 21-06-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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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룡동에 위치한 정려로 대덕초등학교 앞에 여흥 민씨 재실인 영호암과 함께 위치하여 있다.
민평은 1688년(숙종 14), 민환은 1700년(숙종 26), 민삼석은 1744년(영조 20)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세분의 정려와 함께 효행으로 유림의 추대를 받은 민병갑의 처 남양 홍씨(1902~1972)의 효열비도 함께 서있다.
여흥민씨는 민씨삼세칠효로 유명하다. 삼세칠효는 3대에 걸쳐 7명의 효자가 배출된 것을 말한다. 7명의 효자는 정려를 받은 1세대인 민평(1582~1646), 민환(1594~1628) 형제와 정려를 받지 않았지만 효행을 실천한 2세대 민평의 아들 민광신, 민광민 형제 그리고 3세대인 민광민의 아들 민원중, 민경중. 민응중을 말한다. 여기에 민경중의 부인 창령 성씨를 추가해 삼세팔효 라고도 한다.
민평(1582~1646)의 경우 그가 11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을 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 어르신을 모시고 도랑이 있는 계곡에 숨어있었는데 어르신들은 흙이 마른 높은 곳에 모시고 자신은 흙이 젖어 축축하고 낮은 곳에서 지냈다. 이 곳에서 오래 지내게 되자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되었고 결국 불구가 되자 자신이 불구임을 자처하여 호를 언시(言尸)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독했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으나 결국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장지로 가던 중 말에서 떨어져 넓적다리뼈가 부러져 치료하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거짓으로 허락한 후 지름길로 장지로 가 장례를 지켜보았다. 장례 후 시묘살이를 할 때도 미음만 먹으며 예를 다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 지병(비습병)이 잠시 차도가 있어 장례 절차를 진행에 예를 다하였다.
민환(1594~1628)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반찬을 일체 입에 대지 않고 단지 미음만으로 연명하여 삼년상을 마치도록 항상 처음 상을 당했을 때처럼 슬퍼하였다. 후에 아버지께서도 병을 얻어 병세가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진혈 하였으나 끝내 운명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민환은 채소라도 맛있으면 입에 대지 않았고 시묘살이 동안 미음으로 연명하다가 3년을 못채우고 세상을 떠났다.
민삼석(1670~1738)은 삼세칠효의 중 한사람은 아니지만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아버지가 한여름에 병환이 생겨 치료 중 메추리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셨다. 그는 구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들에 나가 하루 종일 찾아다니다가 못 찾고 황혼 무렵 집에 돌아와 밤새도록 하늘에 기도하였다. 다음날 동 틀 무렵 메추리 두 마리가 매에 방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께 고아드려 아버지가 병에 차도가 있어 5개월을 더 연명하셨다.
현대에 여흥 민씨의 세거지가 도시개발(엑스포장 부지 및 군부대 부지 등)로 이전이 필요하여 현재의 위치에 정려 및 재실을 재건하였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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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대전사료총서(叢書) 제12집(輯) 대전시사자료집 Ⅳ」 경종실록 ~ 순종실록 편, 2009
유성문화원, 「선비고을 유성이야기」, 송백헌, 김용관, 2010
대전광역시, 「2015 대전의 역사와 문화재 제6집 덕(德)을 품은 대전」-비지정 유교 문화재, 2015
大田廣域市, 「大田의 忠ㆍ孝ㆍ烈 旌閭誌」, 大田廣域市史編纂委員會,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