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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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500년 특별전 - 정조


 


22대 정조(正祖) 효의왕후(孝懿王后) (건릉/健陵)
생몰년: 정조 1752~1800 효의왕후 1753~1821
재위기간:1776~1800(25세~49세)/24년 3개월
지정사항: 사적 제 206호(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
형식: 합장

1. 정조와 효의왕후의 생애
1 ) 정조(1752-1800)
 조선 22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다.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劇仕子(일명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효장세자孝章世子(뒤에 진종眞宗이 됨)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둥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홍상간洪相簡 · 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해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존재로 삼고 홍문관ㆍ승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인재를 모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임진자壬辰字 · 정유자丁酉字· 한구자團構字· 생생자生生字ㆍ정리자整理字·춘추관春秋館字 등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왕조 초기에 제정,정비된 문물제도를 변화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재정리하기 위해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속오례의續五團義』 ·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 『국조보감國朝寶鴨』 . 『대전통편大典通編』 · 『문원보불文苑黼黻』 · 『동문휘고同文彙考』 · 『규장전운奎章全韻』 · 『오륜행실五倫行』등이 그 결과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이 당쟁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고,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강고하게 세력을 구축하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정조는 이와 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 있게 장려해 문운文運을 진작시켜나갔다.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해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다.
 정조대의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홍기로 일컫기도 한다. 문예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조선중화의식韓羊中華意識이 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北伐論의 대의명분 아래 조선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치禮治의실현이라는 당면과제를 국민상하가 일치단결해 수행해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자긍심과 조선 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고유문화현상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문화의 제반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자신의문집인『홍재전서弘齋全善』를 간행하였고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탁월한 학문적 능력으로 군사의 위상을 확보하여 문화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 밖에도 『일성록日省錄』의 편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궁차징세법宮差徵梅去의 폐지 『자휼전칙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의 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歷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通共政策의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치문제였던 서학西學에 대해 정학正學의 진홍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 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 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제위기간 동안 추진했던 많은 정책은 실현을 보지 못했다.
 1800년 6월에 49세의 나이로 홍서하자 그의 유언대로 융릉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1821년 비 효의왕후가 승하하면서 융릉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롱健陵이되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다.

 

2) 효의왕후(1753-1821)
조선 22대 왕 정조의 원비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좌참찬 김시묵鄧寺默의 딸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증찬성 상언商彦의 딸이다. 한성부 가회방嘉會坊 사제私第에서출생하였다. 1762년 세손빈世孫嬪으로 책봉되어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에서 가례嘉禮를 올렸고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進俸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를 지성으로 모시니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애가 극진하여 화완옹주和緩翁主가 자신을 괴롭혔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하며, 청연淸衍ㆍ청선淸璿 두 군주郡主와는 더욱 우애가 돈독하였다. 청선군주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비통해하였고, 그 자녀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주었다.
 성품이 깨끗하고 절개가 굳어 개인적 사욕私愍에 흐르지 않았기에 사가私家에  내리는은택을 매우 경계하여 수진궁壽進宮과 어의궁於義宮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궐의 재물은 공물이라 하여 사사로이 사가에 물화를 내린 적이 없었다.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尊號가 올려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시호는 예경자수睿敬慈粹孝懿王后이고 능호는 건룽健陵으로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안녕리에 있다.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Ⅷ, p.144~146)

 

 

참고문헌
1. 저서
문화재청,2006 『조선왕릉 답사수첩』, 미술문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역사의 숲 조선왕릉』, ㈜눌와.
이우상, 2008 『조성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다할미디어.
이정근, 2010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주)책으로 보는 세상.
김명선,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①왕릉으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삼성당.
한은경,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②다시 깨어나는 조선 역사와 정신』, 삼성당.
박호진, 2011 『우리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11가지 조선 왕릉 이야기』, 작가정신.
임소연, 2012 『효심을 다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 ㈜문학동네.
이창환, 2014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도서출판 한숲.

 

2.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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