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500년 특별전 - 영조
- 전시일정 : 상시
- 전시관 : 효문화전시관
- 등록일 : 20-10-26 20:28
- 조회수 : 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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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영조(英祖) 정순왕후(貞純王后) (원릉/元陵)
생몰년: 영조 1694~1776 정순왕후 1753~1805
재위기간: 1724~1776(31세~83세)/ 52년 7개월
지정사항: 사적 제 193호(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8-2)
형식: 쌍릉
1) 영조
영조는 조선 제 21 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숙종의 세 아들(景宗·英祖·延齡君)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 숙빈和敬 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耈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金昌集의 종질녀로서 숙종의 후궁이던 영빈寧嬪김씨의 양자로 들어갔다. 덕분에 숙종 말년 왕위계승문제가 표면화 되었을때 그 이복형인 왕세자(후일의 경종)를 앞세운 소론 측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720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이 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측은 왕실 최고 존장자인 대비 김씨 (숙종의 제 2 계비인 仁元王后)의 지지를 받아 연잉군을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하도록 하였다. 노론 측은 나아가 경종의 병환을 내세워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요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종과 소론의 반발로 인해 노론의 4대신(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李健命·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이 일시에 정계에서 축출되는 신축옥사를 겪었다. 이듬해에는 노론이 경종에게 반역행위를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에 의해 임인삼수옥壬寅三手獄이 발생해 노론 4대신을 비롯한 170여명의 노론계 인사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왕세제 또한 역모에 관련된 혐의를 받았으나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도움으로 왕세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종이 재위 4년만인 1724년 후사 없이 요절함에 따라 보위에 올라 국왕이 되었다.
즉위한 후에는 김일경, 목호룡睦虎龍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을 숙청하였다.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붕당朋黨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였으며 1727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정미환국丁未換局)하였다. 1728년 소론과격파에 의해 일어난 무신란(戊申亂 혹은李麟佐의 亂)을 진압한 이후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조제調劑 형태의 탕평책蕩平策을 기본정책으로 삼아 당쟁의 격화를 완화시켰다.나아가 노론 4대신을 신원하고, 신임옥사가 소론과격파에 의해 조작된 무옥証獄임을 천명하는 신유대훈辛酉大訓을 반포해 종전의 노·소론 사이의 탕평에서 벗어나 남·북인까지함께 참여시키는 대탕평을 표방하였다.
노론의 명분 아래 추진된 노론 탕평은 1755년(영조 31) 의 을해옥사로 소론 내 과격파의 잔여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고 또 소론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는 소를 올림으로써 노론 명분이 완전히 승리하였다. 또 이를 『천의소감閩卿召鑑』이란 책자로 반포해 한층 추진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집권세력 내부의 분열이 있었는데, 1749년(영조25) 이래 대리청정을 해온 왕세자를 둘러싸고 표면화되어 종국에는 1762년(영조 38)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을 불러일으켰다.
임오화변 이후 정국은 탕평이 여전히 표방되었으나 홍봉한과 김한구를 대표로 하는 두 갈래의 척신세력의 노론·소론·남인·북인이 이해를 따라 이합집산 하는 형국을 보였다.대체로 영조말기의 정국은 왕세손을 둥에 업은 홍봉한 세력이 우세하였으나 외척에비판적인 일부 관료가 청명당淸明黨을 형성하여 이를 견제하고 여기에 김한구계의 척신이 연결되었으며, 다시 왕세손(후일의 正祖)을 보호하는 세력과 이를 모해하려는 세력 간의 암투가 벌어지는 속에 고령으로 이미 노쇠해 버린 영조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나마 승하하기 몇 달 전 홍인한 둥 권세가의 방해를 물리치고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성사시킴으로써 세손의 즉위를 순조롭게 한 것이 영조의 마지막 영단이었다.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가혹한 형벌을 폐지 또는 개정하였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게 했다. 금주령禁酒令을 내려 사치 · 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으며, 기민創民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을 구제하고자 균역법均役法을 제정하였고 세제稅制의 합리화를 기했다. 한편 북관군병北關軍兵에 조총鳥銃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火車를 제작하였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여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였고, 인쇄술을 개량해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필요한 것은 널리 반포시켜 일반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신학풍에 대한 이해도 깊어 유능한 학자를 발굴해 실학을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영조는 그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함에서 오는 심적 갈등에 이복형인 경종의 독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심지어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마침내는 왕으로서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무신란까지 겪었다. 또한 자녀에 따라 극단적인 애증을 나타내 사도세자의 울화병을 유발하고 부자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런 인간적 결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재위기간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으며, 탕평에 의한 정국안정을 바탕으로 그의 치세의 시기부터 현저해지는 조선왕조의 사회 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문제의 해소를 통해 민심을 다독이고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각별한 군주였다.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역대 국왕 중 가장 많은 어필御筆을 남겼다.
1776년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90년(고종27)에 영조로 고쳐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2) 정순왕후(1745~ 1805)
조선 21대 왕 영조의 계비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오흥부원군鼇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耈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황후貞聖王后 서씨徐氏가 죽자 1759 년(영조35) 왕비에 책봉된 뒤 가례를 행하였다. 1772년에(영조 48) ‘예순睿順’을 비롯하여 1804년(순조4)에 이르기 까지‘성철聖哲’ · ‘명선明宣’ · ‘융인隆仁’ 등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으나 사도세자와의 사이에 틈이 생겨 참소가 심하더니,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을 상소하자 서인庶人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 두어 죽게 하였다. 그 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그에 반대하는 벽파僻派의 대립에서 벽파를 옹호하였으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시파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 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등 천주교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둥 실학자들이 처형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1805 년(순조 5)에 승하하였으며, 시호는 ‘예순 성철 명선 융인 정순왕후睿順聖哲明宣隆仁貞純王后’이다. 능호는 원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영조릉과 쌍릉으로 조성되었다.(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Ⅶ, p.112~114)
참고문헌
1. 저서
문화재청,2006 『조선왕릉 답사수첩』, 미술문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역사의 숲 조선왕릉』, ㈜눌와.
이우상, 2008 『조성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다할미디어.
이정근, 2010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주)책으로 보는 세상.
김명선,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①왕릉으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삼성당.
한은경,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②다시 깨어나는 조선 역사와 정신』, 삼성당.
박호진, 2011 『우리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11가지 조선 왕릉 이야기』, 작가정신.
임소연, 2012 『효심을 다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 ㈜문학동네.
이창환, 2014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도서출판 한숲.
2.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