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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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500년 특별전 - 숙종


 


19대 숙종(肅宗)ㆍ인현왕후(仁顯王后)ㆍ인원왕후(仁元王后) (명릉 / 明陵)
생몰년: 숙종 1661~1720 인현왕후 1667~1701 인원왕후 1687 1757
재위기간: 1674~1720(14세~60세) / 45년 10개월
지정사항: 사적 제 198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2
형식: 쌍릉

 

1) 숙종(1661-1720)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이름은순晃 자는 명보明普이다. 현종의 외아들로 어머니는 청풍부원군淸麟陶 김우명金佑明의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 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이고,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 이며,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 이다
 1661 년 8월 15일 경덕궁慶德宮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책봉되 었고, 1674년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 되던 1720년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숙종의 치세 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지속되어 온 붕당정치朋御攻治가 절정에 이르렀고 서인과 남인이 분열하는 가운데 당폐黨騎가 심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왕의 즉위 초에는현종 말년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나 1680년 남인 인사 허견許堅이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둥과 역모를 꾀한다는 김석주金錫胄의 고변으로 인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였다.
 1689년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왕자(후의경종)에 대한 세자 책봉 문제가 빌미가 되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해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 폐출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남인은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는 연속적인 정국의 변화가 있었다. 그뒤에도 노론·소론 사이의 불안한 연합정권 형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1716년 노론 중심의 정권이 갖춰지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잦은 정권 교체와 함께 복제服制에서 송시열宋時烈의 오례문제誤禮問題를둘러싼 고묘논란告廟論難과 김석주金錫胄 ·김만기·민정중閔鼎重둥 외척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정치에 대한 사류士類의 공격에서 비롯된 임술삼고변壬戌三告夏, 존명의리尊明義理와 북벌론北伐論의 허실을 둘러싼 노론·소론 사이의 명분 논쟁 등 소론 · 노론의 분쟁과 대결 등으로 인해 당파간의 정쟁은 전대에 비할 수 없으리 만큼 격심하였다.
 이러한 정쟁 격화는 붕당정치의 폐단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앞서 현종 때의 예송논쟁으로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의 정국운영 방식의 결과이기도하다. 재위 기간동안 신료사이의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도리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 온 사회 체제 전반의 복구정비 작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대동법大同法을 경상도(1677) 와 황해도(1717) 에까지 실시하여 그적용범위를 전국에까지 확대시켰고 전정田政에 있어서 광해군 때의 양전사업量田事業을계속 추진하여 서북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주전繼菱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호조·공조 및 훈련도감·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전라·경상감영에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통용하게 하였다. 숙종 재위기간에 이루어진 이러한 경제 시책은 조선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일찍이 종래의 폐사군지廢四麟也에 관심을 보여 무창茂昌 ·자성慈城 2진鎭올설치, 옛땅의 회복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의 압록강 연변 출입이 잦아졌는데 마침내 인삼 채취 사건을 발단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 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 정계비定閑卑를 세웠다. 일본에는 1682년과 1711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 수호를 닦고 왜관무역에 있어서 왜은倭銀:六星銀을 사용하는 조례顧列를 확정지었다. 특히 막부幕府를 통하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의 귀속문제를 확실히 하였다.
숙종은 과거 정치 논리에 의해 희생된 인물들을 복권시키는 데에도 신경을 썼다. 대명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여 명나라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뜻으로 대보단大報壇을 지었고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을 복관시켰다. 또한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폐서인廢庶人 되었던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추숭하는 과거를 청산하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희빈장씨의 예에서 보듯이 애증의 편향이 심하고 그것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쳐 당쟁을 격화시켰다는 인식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격심한 당쟁 속에서 왕권강화와 양란 후 피폐해진 사회를 재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양역변통문제에 대한해결시도에서 나타나듯 민생 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민폐의 제거와 민생 안정책의 시행에 주력하였다. 전체적인 면에서 임진왜란 이후 동요된 사회에 대한 수습과재정비 과정을 마무리 지음으로써 18세기 영ㆍ정조연간 경제·사회·문화면에서 ‘르네상스’를 이루는데 큰 밑거름을 제공했다.
 송설체松雪體를 잘썼으며 100여점이 넘는 서화작품에 감평鑑評 울남기는둥 역대 조선군주 중 서화감상에 가장 조예가 깊었던 왕으로 유명하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明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다. 능호에 대해서는 왕후의 능호를 그대로 쓴 인조 장릉長陵의 예에 따라 숙종의 능 역시 먼저 승하한 계비 인현왕후의 능호를 이어 명릉明陵으로호칭되었다

 

2) 인현왕후(1667-1701)
조선 제 19대 왕숙종의 첫 번째 계비이다.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1년(숙종 7)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존경을 받았으나,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희빈장씨 에게서 왕자(후의 경종)가 출생하자, 숙종의 관심은 희빈장씨에게 쏠리게 되었다.
 1689년에 숙종이 왕자를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 등 노론 인사들이 상소를 올려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이 이들을 면직 또는사사시키고 남인들을 등용하자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으며 지위가 오른 희빈장씨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함고당感古堂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뒤 숙종이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소론파의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赫 둥이 폐비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지하려는 남인측 인사인 김덕원金德遠·권대운權大運등을 유배하여 사사시키는 갑술옥사를 거쳐 다시 복위되었다.  이듬해 숙종은 자신의 사위이자 그림에 해박했던 김진규金鎭圭를 시켜 인현왕후의 초상을 그림으로써 국초 정안이후로 페지되었던 왕후의 어진 제작을 부활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신료들은 옛 기록에 왕비의 초상을 그리는것에 대한 뚜렷한 중거가 없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였고 결국 무산되었다. 숙종이 인현왕후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자 한 일에 대해 사관史官이"대개 임금이 중전中殿의 간험眼險을 갖추어 맛보고 아름다운 덕이 있으며 허물이 없음을 생각하여 후세의 자손으로 하여금 모두 안색顔色을 우러러 봄을얻게 하고자 하였으며 ….’’라고 기록한 실록기사를 통해 평소 인덕이 많았던 왕후의 소양을 엿보게한다.
1701년 음력 8월 14일 병으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 시호가‘효경 숙성 장순 의열 정목 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懿烈貞穆二顯王后’로 정해졌고 능호는 명릉’, 전호殿號는 ‘경녕敬寧’으로 숙종과 같은 능침에 자리하고 있다.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궁중수필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3) 인원왕후(1687-1757)
조선 제 19대 왕 숙종의 두번째 계비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의3대손이며,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김주신金柱臣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다음해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 천연두를 앓았으나 소생했고, 2년 뒤에 ‘혜순惠順’ 이라는 호를 받았다.
 숙종이 승하한 뒤 왕대비로 있으면서 1722년 ‘자경慈敬’, 1726년 ‘헌열獻烈’, 1740년 ‘광선현익光宣顯翼’, 1747년 ‘강성康聖’, 1751년 ‘정덕貞德’, 1752년 ‘수창壽昌’, 1753년 ‘영복永福’, 1756년 ‘융화隆化’ 등의 많은 존호尊號를 받았으며, 사후에는 ‘정의장목定懿章穆’이라는 휘호徽號를 받았다. 슬하에 소생은 없다.
 시호는 ‘혜순 자경 헌렬 광선 현익 강성 정덕 수창 영복 융화 정의 장목 인원왕후 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定懿章穆仁元王后’라 하였고, 능호는 명릉으로 서오릉 경역 내에 있다.(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Ⅵ, p.12~15)

 

참고문헌
1. 저서
문화재청,2006 『조선왕릉 답사수첩』, 미술문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역사의 숲 조선왕릉』, ㈜눌와.
이우상, 2008 『조성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다할미디어.
이정근, 2010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주)책으로 보는 세상.
김명선,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①왕릉으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삼성당.
한은경,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②다시 깨어나는 조선 역사와 정신』, 삼성당.
박호진, 2011 『우리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11가지 조선 왕릉 이야기』, 작가정신.
임소연, 2012 『효심을 다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 ㈜문학동네.
이창환, 2014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도서출판 한숲.

 

2.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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