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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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500년 특별전 - 효종


 


17대 효종(孝宗) ㆍ인선왕후(仁宣王后) (영릉 / 寧陵)
생몰년: 효종 1619~1659 인선왕후 1618~1674
재위기간: 1649~1659(31세~41세)/10년
지정사항: 사적 제195호(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
형식: 쌍릉

 

 

1) 효종과 인선왕후의 생애
가. 효종(1619 ~ 1659)
효종은 조선 제17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이다. 호는 죽오竹梧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렬왕후仁烈王后이다.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19년 5월 22일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 부근)에서 태어났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고, 1631년 12세에 장씨와 혼인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종실 및 남녀 양반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소현세자 곁에서 형을 적극 보호했다.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반대하며 자신을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해 동행을 막았다. 그 뒤 서역西域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해 그를 보호하였다.
 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 만인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효종은 청나라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해 4월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5월에 조선으로 돌아와 9월 27일 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오랫동안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해관, 금주위錦州衛 송산보松山堡까지 나아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 개원위開元衛 등으로 끌려 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청나라에 원한을 품었으므로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 일환으로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金自點 등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켰다. 그리고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와 반역적 역관譯官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 등이 청나라에 밀고해 북벌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졌고 그 결과 즉위 초에는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비축할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1650년 조선에 대해 강경책을 폈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1651년(효종 2) 12월 이른바 조귀인趙貴人(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청나라에 있던 역관배들도 세력을 잃음으로써 이듬해부터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원두표元斗杓 등의 무장을 종용해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했다.
 서울 외곽의 방위를 크게 강화하려고 원두표를 강화도로, 이후원李厚源을 안흥으로, 이시방李時昉을 남한산성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자연도紫燕島(경기도 부천시)로 보내어 성지城池를 보수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강화했다.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정벌을 핑계로 산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적극적으로 확충했다.
 마침 조선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을 훈련도감에 들여 조총·화포 등 신무기를 개량·보수하도록 했으며,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기 위해 염초焰硝 생산에 전력했다. 뿐만 아니라 직접 관무재觀武才 등에 자주 참가해 군사훈련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효종의 군비 확충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국세가 확고해져 북벌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효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외침으로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다시 확립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2년에는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었다. 전세田稅를 1결結당 4두斗로 고정시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문화면에서도 1653년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역법曆法을 개정했다. 태음력의 옛 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 시간을 계산해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하도록 했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여 간행했다. 그리고 공주목사 신속申洬이 엮은 『농가집성農家集成』을 간행해 농업 생산량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1656년에는 전쟁 후에 흐트러진 윤리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內訓』과 김정국金正國이 쓴 『경민편警民編』을 간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해 간행했다.
 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전념해 군비 확충에 몰두한 군주였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해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한 대신들과 뜻이 맞지 않아 결국 북벌의 의지를 이루지 못했다.
 1659년 5월 4일 41세를 일기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시호는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 5월 11일 처음에는 시호를 ‘열문의무 신성지인烈文毅武神聖至仁’으로, 능호陵號를 ‘익릉翼陵’이라 하였으나, 열문·의무·지인이 모두 열성조의 휘호를 범했다 하여 다시 ‘선문장무 신성현인宣文章武神聖顯仁’으로 고치고 능호도 ‘영寧’으로 고쳤다.
 처음에는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장지를 마련했으나 1673년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옮겼다. 「효종대왕 애책문」에는 “천년을 지키고 있을 상석象石을 설치해 놓았으니, 영원토록 온갖 혼령들을 꾸짖으며 [능을] 보호하리라[儼象設於千齡, 長護呵兮百靈]”라고 하여 영릉의 석물들이 효종의 영혼을 보호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나. 인선왕후(1618~1674)
인선왕후는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비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봉림대군鳳林大君의 부인으로 간택되어 다음해에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으로 봉하여졌다.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이 심양瀋陽에 인질로 갈 때 따라가 8년이나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1645년 소현세자가 죽으면서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을 제때 받지 못하여 사저私邸에서 왕자를 낳았다. 그 뒤 책봉되어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2년 뒤 정식으로 책명을 받았다. 1661년(현종 2)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아 왕대비로 있다가 1674년 질병을 얻어 오래도록 고생하다 경덕궁慶德宮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때 왕후의 시어머니인 인조비 장렬왕후가 어떤 복服을 입느냐 하는 예송禮訟이 일어나, 기년복朞年服과 대공복大功服을 둘러싸고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䪪가 대립하여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으니, 현종과 숙안淑安·숙명淑明·숙휘淑徽·숙정淑靜·숙경淑敬 등 공주들이다. 많은 한글편지를 남겼으며, 다섯 공주에게 궁체로 쓴 언간諺簡이 유명하다. 승하 후 ‘경렬명헌敬烈明獻’의 휘호가 올려졌다. 시호는 ‘효숙경렬명헌인선왕후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이다. 승하 후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효종 능 아랫자락에 장사지냈다.(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Ⅴ, p.207~208)

 

 

참고문헌
1. 저서
문화재청,2006 『조선왕릉 답사수첩』, 미술문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역사의 숲 조선왕릉』, ㈜눌와.
이우상, 2008 『조성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다할미디어.
이정근, 2010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주)책으로 보는 세상.
김명선,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①왕릉으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삼성당.
한은경,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②다시 깨어나는 조선 역사와 정신』, 삼성당.
박호진, 2011 『우리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11가지 조선 왕릉 이야기』, 작가정신.
임소연, 2012 『효심을 다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 ㈜문학동네.
이창환, 2014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도서출판 한숲.

 

2.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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