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500년 특별전 - 인조
- 전시일정 : 상시
- 전시관 : 효문화전시관
- 등록일 : 20-10-2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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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인조(仁祖)ㆍ장렬왕후(莊烈王后) (장릉 / 張陵)
생몰년: 인조 1595~1649 장렬왕후 1594~1635
재위기간:1623~1649(29세~55세)/ 25년 2개월
지정사항: 사적 제203호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형식: 합장
1) 인조와 인렬왕후의 생애
가. 인조(1595 ~ 1649)
인조는 조선 제16대 왕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종倧, 자는 화백和伯이다. 호는 송창松窓이다. 선조의 손자로, 정원군定遠君(추존왕 元宗)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렬왕후仁烈王后이다.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 이어 능양군綾䲳ੑ에 진봉進封되었다.
광해군 재위 연간에는 대북파가 정권을 잡아 왕으로 하여금 영창대군永昌大君를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게 했으며,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정치가 혼란하였다. 이에 1623년 서인 김류金瑬,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출하자 인조는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윤허를 받아 왕위에 추대되어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 광해군 때 희생된 영창대군, 임해군臨海君 진珍,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등의 관직을 복관시켰다. 그러나 반정공신들을 중용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1624년(인조 2) 난을 일으키자 공주까지 남천南遷했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관군의 활약으로 이괄을 격파한 덕에 한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인조는 외교정책에 있어 광해군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광해군이 명나라, 금나라와의 관계를 동시에 맺는 중립정책을 썼다면, 인조는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통해 금나라를 배척하였다. 1624년 총융청摠戎廳과 수어청守禦廳 등 새로이 군영을 설치해 북방北防과 해방海防에 대비했으나, 1627년 후금의 군사 3만여 명이 침략해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강화도로 천도하기도 했다.결국 최명길崔鳴吉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만나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을 맺었다. 1636년 12월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는 청나라의 제의를 거부하자, 청나라는 다시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막강한 인원과 장비로 무장한 청나라 군사를 막지 못하였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과 비빈妃嬪을 강화도로 보낸 뒤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물러가 항거했다. 이때 척화파와 주화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주화파의 뜻에 따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지금의 松坡)에서 군신의 예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삼자는 청나라 측의 요구를 수락하였다.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두 차례의 호란으로 악화되어, 조선의 사회·경제 상황은 매우 열악해졌다. 그러나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했고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해 북관北關의 회령 및 경원개시慶源開市, 압록강의 중강개시中江開市가 이뤄졌다.
1641년에는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공표했으며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孼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하여 어려워진 민생을 해결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인조는 외교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증진에 힘써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보편東史補編』, 『서연비람書筵備覽』 등 여러 서적을 간행토록 하였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김육金堉, 김집金集 등 뛰어난 학자가 활동하여 조선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룬 시기도 인조 재위연간이었다.
1649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5월 15일 시호를 ‘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으로, 전호殿號는 ‘영사永思’, 묘호는 처음에 ‘열조烈祖’로 올렸다가‘인조仁祖’로 개호하였다. 능호은 ‘장릉長陵’으로, 처음에는 경기도 파주 북운천리北雲川里 묘좌유향卯坐酉向 자리에 장사지냈으나, 1731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즉 지금의 자리로 천릉하였다. 서화에 조예가 있어 감상하기를 즐겨했으며 창작한 작품 일부가 전해오고 있다.
나. 인렬왕후(1594~1635)
인렬왕후는 인조의 정비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원주 읍내 우소에서 출생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능양군(후의 인조)과 결혼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해졌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왕비가 되었다. 인조가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보필했다고 하며, 인조가 그림 감상을 오래하고 있으면 “바라건대 이를 보시면서 위태로움과 두려운 바를 생각하시고, 애완하는 물건으로만 여기지 말으소서”라며 조언했다고 한다.
1651년(효종 2) ‘명덕정순明德貞順’으로 휘호가 추상되었다. 슬하에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효종, 소현세자昭顯世子, 인평대군麟坪大君, 용성대군龍城大君, 그리고 조졸早卒한 두 아들이다. 왕후는 마지막 아들을 낳다가 산후병을 얻어 1635년 12월 9일 산실청에서 승하하였다. 인렬왕후가 승하한 후 계비를 취하라는 대신들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끝까지 재취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장렬왕후 조씨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시호는 ‘명덕정순인렬왕후明德貞順仁烈王后’이고 전호는 ‘숙령肅寧’이라 하였다. 원래 인조 능과 쌍릉으로 조성되었으나, 1731년(영조 7) 파주시 탄현면으로 천릉되면서 동원합장릉을 이루었다.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Ⅴ, p.13~14)
참고문헌
1. 저서
문화재청,2006 『조선왕릉 답사수첩』, 미술문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역사의 숲 조선왕릉』, ㈜눌와.
이우상, 2008 『조성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다할미디어.
이정근, 2010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주)책으로 보는 세상.
김명선,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①왕릉으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삼성당.
한은경,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②다시 깨어나는 조선 역사와 정신』, 삼성당.
박호진, 2011 『우리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11가지 조선 왕릉 이야기』, 작가정신.
임소연, 2012 『효심을 다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 ㈜문학동네.
이창환, 2014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도서출판 한숲.
2.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