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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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500년 특별전-선조


 


14대 선조(宣祖)ㆍ의인왕후(懿仁王后)ㆍ인목왕후(仁穆王后) (목릉 / 穆陵)
생몰년: 선조 1552~1608 의인왕후 1555~1600 인목왕후 1584~1632
재위기간:1567~1608(16세~59세)/ 40년 7개월
지정사항: 사적 제193호(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형식: 동원이강릉

 

 

1) 선조·의인왕후·인목왕후의 생애
가. 선조(1552~1608)
선조는 조선 제14대 국왕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초명은 균鈞, 뒤에 연昖으로 개명하였다. 1552년 11월 11일 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출생하였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岧의 셋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증영의정贈領議政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어렸을 때부터 명종의 총애를 받고 자랐으며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고,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훙서하자 그 해 즉위하였다. 즉위한 후에는 훈구세력勳舊勢力을 물리치고 사림士林들을 대거 등용하여 명유名儒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며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당시 사유師儒를 선발함에 있어 문사文詞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있는 데다 관리를 뽑는 데도 오직 과거에 의거해 선비의 습속이 문장에만 치우쳐져 있었다. 이러한 병폐를 없애기 위해 학행學行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여 각 고을을 순행하며 교회敎誨에 힘쓰도록 하였다.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조식曺植과 성운成運 등 유능한 인재들을 관력에 구애받지 않고 초빙하기도 했다. 『유선록儒先錄』,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소학』 등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서적과, 국가의 윤리 기강을 정립하기 위해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짓도록 하고 모두 간행하여 널리 읽도록 하였다.
  왕위에 오르자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자 하는 작업을 단행하였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를 추숭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伸寃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죽이고 녹훈錄勳을 받은 이기李㣇와 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削勳하였다. 사서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1588년에는 명나라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라는 그릇된 사실이 200년간이나 전해 내려온 것을 윤근수尹根壽 등을 사신으로 보내 시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 연간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은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김효원金孝元·심의겸沈義謙을 중심으로 당쟁을 벌여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당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론政論이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이의 조정에도 불구하고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1591년 세자책봉 문제로 집권한 동인 역시 서인에 대한 논죄 문제로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이로써 정계는 당쟁에 휘말렸으며 국력은 더욱 쇠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선조 연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국가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다. 내부 쟁론으로 인해 국정이 어려웠을 무렵, 1583년과 1587년 2회에 걸쳐 이탕개尼蕩介가 주동이 된 야인野人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府內의 모든 진보鎭堡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에 온성부사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을 시켜 그들을 무너뜨리고 두만강을 건너 소굴을 소탕시켰다. 1590년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등을 일본에 파견해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고 이에 국방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던 중,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지고 재차 왜군이 침입하자[정유재란丁酉再亂] 다시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1604년에 호성扈聖·선무宣武·청난淸難 등의 공신을 녹훈하여 전쟁의 마무리를 짓고 전후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서인의 당쟁은 더욱 격심해져서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선조는 두 대비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도가 지극하였다. 성품이 본디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색聲色이나 오락을 좋아하지 않았고,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 항상 절용節用하고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해 한 톨의 낱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당대 명필 석봉 한호韓濩의 서풍에 영향을 받아 호방한 필치를 구사했고 대나무와 난을 잘 그렸다(그림 1). 선조의 어필은 육필본肉筆本으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고 석판이나 목판으로 인쇄된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1608년 2월 1일 정릉동 행궁(지금의 덕수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전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고, 묘호는 처음에 선종宣宗으로 올렸다가 1616년 8월 광해군에 의해 ‘선조宣祖’로 격상되었다. 능호는 처음에 숙릉肅陵으로 정했으나, 1608년 5월 ‘목릉穆陵’으로 고쳤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안장되었다.


나. 의인왕후(1555~1600)
의인왕후는 선조의 정비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번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이다. 1569년(선조 2)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고, 1590년 장성왕후章聖王后의 존호를 받았다. 
 1600년 6월 27일 정릉동 행궁에서 46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왕궁이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선조가 평안도 의주에서 돌아왔을 때 거처할 곳이 없어 임시로 정릉동 행궁에 머물러 있었는데, 때마침 의인왕후가 이곳에서 산후병産後病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빈전은 계림군 이류李瑠의 집으로 결정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왕후의 상장喪葬은 전란 직후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치러지다 보니 5개월장의 관례를 깨고 7개월까지 연장된 끝에 12월 22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때 제작된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는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와 더불어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초기 의궤가 모두 유실된 후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이다.
 승하한 뒤 1604년(선조 37) 휘열徽烈의 존호가 더해졌고 1610년(광해군 2) 정헌貞憲의 존호가 가상加上되어 시호가 ‘장성휘열정헌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懿仁王后’로 최종 확정되었다.
 혼전은 ‘효경孝敬’이다.12 능호는 처음에 유릉裕陵으로 정했다가 선조의 능이 조성되면서 ‘목릉穆陵’으로 고쳤다.

 

다. 인목왕후(1587~1632)
인목왕후는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계비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 7월 13일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이때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嫡統論에 입각하여 적출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였고 대북정권이 들어서자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광해군의 이러한 행위는 결국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1632년 여름 병으로 누운 지 한 달이 지나 더욱 위독해져, 6월 28일 갑오甲午에 인경궁仁慶宮의 흠명전欽明殿에서 49세로 승하하였다. 대제학 장유張維(1587~1638)가 지은 지문誌文에 의하면 왕후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1613년 계축화변癸丑禍變 이후 3년 동안 밥을 먹지 아니했고, 복服을 벗고서는 미음죽만 먹었으며, 복위되고서도 어육魚肉을 먹지 않았으니 대개 소밥을 먹은 지 전후 통틀어 17년이었다고 전한다.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어른으로서,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 서예에도 능통해 선조 임금의 영향을 받아 남성적인 필치에 능했다.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있으며 필적 역시 전해오고 있다.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이고, 능호는 처음에 혜릉惠陵으로 정해졌으나 이후 ‘목릉穆陵’으로 개호되었다.(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Ⅳ, p.193~197)

 

 

참고문헌
1. 저서
문화재청,2006 『조선왕릉 답사수첩』, 미술문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역사의 숲 조선왕릉』, ㈜눌와.
이우상, 2008 『조성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다할미디어.
이정근, 2010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주)책으로 보는 세상.
김명선,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①왕릉으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삼성당.
한은경,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②다시 깨어나는 조선 역사와 정신』, 삼성당.
박호진, 2011 『우리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11가지 조선 왕릉 이야기』, 작가정신.
임소연, 2012 『효심을 다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 ㈜문학동네.
이창환, 2014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도서출판 한숲.

 

2.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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