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500년 특별전 - 인종
- 전시일정 : 상시
- 전시관 : 효문화전시관
- 등록일 : 20-10-2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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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인종(仁宗)ㆍ인성왕후(仁聖王后) (효릉 / 孝陵)
생몰년: 인종 1515~1545 인성왕후 1514~1577
재위기간:1544 ~ 1545(30세~31세) / 9개월
지정사항: 사적 제200호(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40-2)
형식: 쌍릉
1) 인종과 인성왕후의 생애
가. 인종(1515~1545)
인종은 조선 제12대 국왕이다. 이름은 호峼이고 자는 천윤天胤이다. 1515년 2월 25일에 태어났다. 본래 아명兒名이 억億이었으나, 중종이 이름을 개명한 것이다. 중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비는 첨지중추부사 박용朴墉의 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인성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자 숙빈 윤씨, 귀인 정씨를 후실로 맞았으나 역시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원자元子 시절부터 성품이 질박하고 신중하여 천자문과 『소학小學』등을 충실히 익혔다하며 이러한 인종을 주고 중종은 “원자는 국가의 근본이니, 관계된느 바가 매우 크다. 출생하자 좌우에 있을 사람을 가리어 예의禮儀로써 가르침은 반드시 앞날에 중요한 종묘와 사직을 이어받게 되기 때문이니,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라며 친히 잠箴울 지어 주었을 정도로 세자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약 6개월에 걸쳐 중종과 조종대신들의 책봉철차 논의 끝에 1520년(중종 15) 4월 22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522년 9월 19일 관례冠禮를 행하였고 같은 해 10월 25일 성균관에 입학하여 미래의 군왕이 될 소양을 본격적으로 쌓는 절차를 밟았다. 1544년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자 그해 바로 즉위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로 폐지된 현량과賢良科를 복구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참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1482~1510)를 비롯하여 기묘명현己卯名賢을 신원伸冤해 주는 등 어진 정책을 펼치려 노력했다. 동궁으로 있을 때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엿다.
1545년(인종 1) 병환이 위독해지자 대신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경원대군慶原大君(후의 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해 10월 15일 고양군高陽郡의 치소治所 남쪽에 있는 부친의 능인 정릉靖陵(1562년 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으로 천릉) 곁 간좌곤향艮坐坤向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이는 유명遺命에 의한 것이었다. 능호는 ‘효릉孝陵’이라 하고 전호는‘영모永慕’ 라 하고 시호는 ‘헌문 의무 장숙 흠효獻文懿武章肅欽孝’라 하였다.
『인종실록』의 「총서」편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재지才智가 빼어나 3세에 능히 글의 뜻을 알았고 6세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매우 고요하고 욕심이 적으며 인자하고 공손하며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실천이 독실하였으므로 동궁東宮에 있은 지 25년 동안 어진덕이 널리 알려졌다.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게 되어서는 중외가 지치至治를 기대했었는데, 상중喪中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갑자기 승하하게 되었고 또 뒤를 이을 아들도 없었으니, 애석하다. 1년간 재위在位하였고 수壽는 31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를 계승할 후사後嗣가 없었다는 사실과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재위 연간이 짧은 사실에 대해 애석함을 느낀 사관史官의 심정이 엿보인다. 태어난 지 6일 만에 생모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계모 문정왕후의 손에 자라야 했던 인종은 문정왕후의 정치적 압박 속에서 많은 부담을 느끼며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그럼에도 스스로 효성이 부족함을 자책하고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인성왕후와의 슬하에 자녀를 두지 않았다고 전한다. 주변에 학덕이 후덕한 인재를 두고자 했으며 세자시절부터 당대 명유名儒였던 이언적李彦迪(1491 ~ 1553)을 신뢰하여 보위에 오른 후 관직을 내려 총애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이언적의 고택인 경주 동락당獨樂堂 어서각御書閣에는 인종이 이언적에게 내린 글씨가 보관되어 있다.
등극한 지 1년도 안 되어 경복궁 정침正寢에서 31세로 승하하였다. 1544년 11월 등극하여 부왕의 국장을 치렀으나 1545년 7월 1일 승하함으로써 1년도 채 되지 않아 자신의 무덤을 만들게 된 비운의 왕이다. 1545년 10월 15일 효릉孝陵에 장사지냈다.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Ⅳ, p.13~14)
나. 인성왕후(1514~1577)
인성왕후는 조선 제12대 왕 인종仁宗의 비妃이다. 아버지는 금성부원군 반남 박씨 박용朴墉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이다. 1514년(중종 9) 10월 1일에 태어났다. 1524년(중종 19) 박씨 나이 11세 되던 해에 인종과 혼인하여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544년 11월 인종이 왕으로 즉위하고 왕비가 되었으며 이때 나이 31세였다. 인종의 재위기간은 불과 9개월이었으며 인성왕후는 인종 승하 후 32년간을 자녀 없이 홀로 살다가 1577년(선조 10) 11월 29일 경복궁에서 64세로 승하하였다. 능은 이듬해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의 서삼릉 묘역에 효종 능과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조선전기 많은 왕실여인들이 그러했듯이, 인성왕후 또한 독실한 불교신자였기에 승하한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1550년(명종 5) <도갑사 관음32응신도道岬寺觀音三十二應身圖>를 발원하였다(그림 2). 이 불화는 화승畵僧이 아닌 화원 이자실李自實이 주도하여 그린 것으로, 정교한 산수화가 강조된 구도와 화려한 색채로 인해 16세기 왕실발원 불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Ⅳ, p.14)
참고문헌
1. 저서
문화재청,2006 『조선왕릉 답사수첩』, 미술문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역사의 숲 조선왕릉』, ㈜눌와.
이우상, 2008 『조성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다할미디어.
이정근, 2010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주)책으로 보는 세상.
김명선,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①왕릉으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삼성당.
한은경,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②다시 깨어나는 조선 역사와 정신』, 삼성당.
박호진, 2011 『우리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11가지 조선 왕릉 이야기』, 작가정신.
임소연, 2012 『효심을 다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 ㈜문학동네.
이창환, 2014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도서출판 한숲.
2.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