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500년 특별전 - 인조비 장렬왕후(휘릉)
- 전시일정 : 상시
- 전시관 : 효문화전시관
- 등록일 : 20-10-26 20:41
- 조회수 :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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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인조 비 장렬왕후(莊烈王后) (휘릉 / 徽陵)
생몰년: 1624~1688
지정사항: 사적 제 193호(경기도 그리시 인창동 산5-2)
형식: 단릉
1) 장렬왕후(1624~1688)의 생애
장렬왕후는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계비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아버지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의 딸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다. 인조와 같은 날인 11월 7일에 태어났다.
인조의 원비 인렬왕후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뜨자 1638년(인조 16) 15세의 어린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어 효종의 잠저인 의동본궁義洞本宮에서 가례를 올렸다. 이때 인조는 44세였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대비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로 불렸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 올랐으며 그로부터 5년 후 손자인 현종마저 세상을 떠났다.
장렬왕후는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50년간 인조, 효종, 현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4명의 국왕을 모시고 3명의 국왕을 떠나보낸 경험을 하였다. 또한 스스로 나서서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은 없으나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의 국상國喪 때 대비가 입어야 할 복상服喪 문제가 붉어지면서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1·2차 ‘예송논쟁’의 중심에 서야 했다. 예송논쟁은 17세기 종법宗法과 적장자 의식이 성리학적 의론으로 편제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남인정권이 들어서게 되어 정국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숙종이 친히 쓴 「대왕대비행록기」에 의하면 왕후는 나라에 기근이 들면 평소 비축해두었던 자산을 털어 구휼에 힘쓰라고 보탰다고 하며, 어려운 백성을 생각하여 사치스런 생활을 배제하고 행실을 만사 조심하여 왕실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1688년 8월 26일 65세를 일기로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세상을 떴다. 당일 총호사의정부좌의정 조사석趙師錫을 필두로 한 총 53명의 관리로 구성된 국장도감이 설치되었고 같은 해 12월 15일 발인하였다. 장렬왕후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1688)는 어람용으로 외규장각 의궤에 유일하게 전해오고 있으며, 이 책에 수록된 반차도는 섬세한 색채와 자연스런 필치가 돋보여 조선시대 반차도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힌다.
1688년 9월 초3일 ‘자의공신휘헌강인정숙온혜장렬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貞肅溫惠莊烈王
后’로 시호를 정하였다. 『숙종실록』에 “장렬莊烈은 천리踐履가 바르면서 뜻이 화평한 것이 장莊이고, 덕德을 갖고 선업先業을 준수遵守한 것이 열烈이다. 휘호徽號는 ‘정숙 온혜貞肅溫惠’라 하였으니, 큰 계획을 능히 성취한 것이 정貞이고 몸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린 것이 숙肅이며, 덕성德性이 너그럽고 화평한 것이 온溫이고, 부지런히 베풀어 사私가 없는 것이 혜惠이다”라고 하였다. 전호殿號는 ‘효사전孝思殿’이고 능호陵號는 ‘휘릉徽陵’이다(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Ⅴ, p.117~119)
참고문헌
저서
문화재청,2006 『조선왕릉 답사수첩』, 미술문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역사의 숲 조선왕릉』, ㈜눌와.
이우상, 2008 『조성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다할미디어.
이정근, 2010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주)책으로 보는 세상.
김명선,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①왕릉으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삼성당.
한은경,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②다시 깨어나는 조선 역사와 정신』, 삼성당.
박호진, 2011 『우리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11가지 조선 왕릉 이야기』, 작가정신.
임소연, 2012 『효심을 다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 ㈜문학동네.
이창환, 2014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도서출판 한숲.
2.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