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500년 특별전 - 고종
- 전시일정 : 상시
- 전시관 : 효문화전시관
- 등록일 : 20-10-26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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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고종(高宗) 명성왕후(明聖王后) (홍릉/洪陵)
생몰년: 고종 1852~1919 명성왕후 1851~1895
재위기간: 1863~1907(12세~56세)/43년 7개월
지정사항: 사적 제 207호(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형식: 합장
1. 고종과 명성황후의 생애
1) 고종(1852-1919)
조선 제 26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이며 후에 희熙로 개명하였다. 호는 성헌(誠軒)이다.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이다.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이때 안동김씨 세도의 화禍를
피해있었던 이하응은 조성하趙成夏를 통해 궁중 최고어른인 조대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服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즉위 후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으니, 훗날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은 당시 12세의 어린나이 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홍선대원군으로 국정을 총람, 대신 섭정하게 하였다. 고종이 장성하여 직접 통치를 하려는 의욕을가지게 되자 홍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민비와 노대신들은 유림을 앞세워 대원군의 하야를 주장하였다.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직접 정치를 다스린다는 서무친재庶務親裁의 명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권한을 환수하고 통치대권을 장악하였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정권은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척족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명성황후의 척족정권은 홍선대원군이 취하였던 강력한 척사양이정책斥邪攘夷政策과는 달리, 대외 개방정책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새로운 국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후 계속해서 구미 열강과도 조약을 맺는 등 적극적으로 개항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고종과 민씨정권은 개항 후 일련의 개화시책을 추진하여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과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였다. 또한 부산·원산·인천 둥의 항구를 개항하여 개화문명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개화시책을 틈타 일본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침투해오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대립이 점차 첨예화되어 갔다. 그러나 변법變去에 의한 근대국가건설을 추진하려는 개화당과 기존구체제의 유지를 고집하는 수구세력간의 계속된 알력은 결국 1882년 임오군란을,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오경장초기 은퇴한 후였던 홍선대원군은 일부 개혁 세력의 추대를 받아들여 궁중에 들어가서 고종으로부터 정치적 실권을 위임받았다. 개혁 주도세력과 일본공사등은흥선대원군의 직접 간여를 꺼려 그의 실권은 거세한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고 홍범14조洪範十四條를 제정하여 자주독립을 종묘에 맹세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 중 노골적인 침략적 간섭과 이권 탈취에 혈안이 되었다. 그 결과 고종은 점차 일본을 혐오하게 되었고,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친로정책親露政策을 펴게 되었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는 친일정객과 모의하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폭거를 자행 하였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왕비를 잃었으며, 일본의 압력으로 폐서인廢庶人조처까지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 명성황후의 복위 조서語書를 내려 빈전을 태원전泰元殿에 설치한뒤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비로소 청량리 홍릉洪陵에 국장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군사적 압력과 정치적 간섭을 강화하자, 고종은 친일 세력을 물리치고자 친러 정객과 내통하고 1896년 2월 돌연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친러정부가 집정하면서 열강에게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둥 국가의 권익과 위신이 추락하고 국권의 침해가 심하여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선양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였으며,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하였다. 고종은 1900년 둘째아들을 의친왕義親王, 셋째 아들을 영친왕英親王에 봉하고, 1901년 순빈 엄씨淳嬪嚴氏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져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렬해지는 가운데 장호익張浩翼등이 황제폐립을 음모하였으나 무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압력 하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즉 제 1차 한일협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을사오적의 친일 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고종은 미국에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려 미국공사이자 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있었던 헐버트(Hulbert)를 통해 미국에 밀서를 보내려 하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 국정에 전반적으로 간여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은 마침내 한국 문제를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자 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상설李相卨(전 의정부참찬)ㆍ이준李儁(전 평리원 검사)ㆍ이위종李瑋鍾(주러조선공사관 서기관)을 파견하였다. 한편, 러시아황제 니콜라스 2세에게 친서를 보내어 이들 특사 활동에 원조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고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 등 친일 매국 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였으며, 고종은 태황제太皇帝가 되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위虛位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主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승하하였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 당하였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因山禮로 국장이거행될때1919년 3월1일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2) 명성황후(1851~1895)
조선 26대 왕 고종의 비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부친은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이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한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대원군의 실각 후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개화당정부에 잠시 정권을 빼앗겼으나 청국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1885년에 거문도 사건이 일어났을 때 뭔렌도르프(Mllendorf,P.G.)를 일본에 파견해 영국과사태 수습을 협상하게 하였다.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홍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여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적극적인 침략 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민비 세력을 거세하려고 하였다. 민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배후에 있는 개화세력에 대항하였다.
조선의 친러 경향이 강해지자 일본공사 미우라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명성황후와 척족,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하였다. 1895년 8월, 일본 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 일부 친일정객과 짜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해 민비를 시해한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민비는 나이 45세로 살해되어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당시 정부는 친일정책을 펴 폐비조칙廢妃紹勅을내렸다. 그러나 고종에 의해 10월10일 복위되어 태원전泰元殿에 빈전을 설치하고 숭룽崇陵 우강右崗에 능호를 숙룽肅陵이라 하여 국장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 추존되고 난 뒤 11월 양주 천장산天藏山아래(지금의 청량리부근)국장되어 홍릉洪陵 이라 하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2월지금의 자리로 천릉되었다.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Ⅸ, p.236~239)
참고문헌
1. 저서
문화재청,2006 『조선왕릉 답사수첩』, 미술문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역사의 숲 조선왕릉』, ㈜눌와.
이우상, 2008 『조성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다할미디어.
이정근, 2010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주)책으로 보는 세상.
김명선,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①왕릉으로 보는 조선왕조 500년』, 삼성당.
한은경, 2010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②다시 깨어나는 조선 역사와 정신』, 삼성당.
박호진, 2011 『우리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11가지 조선 왕릉 이야기』, 작가정신.
임소연, 2012 『효심을 다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 ㈜문학동네.
이창환, 2014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도서출판 한숲.
2.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