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안산군 적면 강태홍의 아들 강세호 위 사람은 효와 봉양에 힘쓰는 고을의 모범으로, 그의 덕행이 뛰어나므로 금10원의 상금을 하사한다. 1910년 8월 29일 통감부 육군대장”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에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라는 마을 106번지에 강태홍(제흠)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내 나주 유씨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강세호, 둘째 아들은 강승호였다.
| 명 칭 | 효자 강세호 표창 |
|---|---|
| 시 대 | 일제강점기 |
| 재 질 | 지류 |
| 입수일자 | 2021. 8. 27. |
| 입수처 | 후손 강완형 기증 |
강세호의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했다. 아버지는 남의 땅을 경작하여 살았고,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아들 둘을 키우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당에 다니기 조차 어려운 상황이었고, 강세호 역시 학문을 배우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글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본래 성품이 온후하고 인자하여 차차 장정하면서 남다른 인격을 갖추게 되었다.
첫째로, 그는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했으며, 집 밖에서는 항상 어른들에게 공손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마음가짐을 가졌다. 본인의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웃의 관혼상제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주저없이 도와주였다. 이런 행동은 훗날 주변 사람들이 “육십 평생에 처음 듣고 본 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칭찬이 자자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또한, 조상을 위하는 마음이 남달라 제삿날에는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조석으로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어머니가 병환이 있으실 때는 밤낮없이 곁을 지키며 간호하였고, 근심과 걱정으로 스스로 밥을 먹지도 않고 걱정으로 스스로 밥을 먹지도 않고, 머리도 빗지 않고, 옷을 벗고 자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시킬까 봐 몸이 불편해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덧 강세호의 어머니가 연세가 많아져 병을 얻어 몸져 누우시게 되자, 어머니는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의원을 불러서 치료도 해보고, 무당을 불러서 굿도 해보았지만, 어머님의 병환이 조금도 호전되지 않자, 사람에게는 사람의 피가 좋다는 생각이 들어 돌연 밖으로 나가 자신의 왼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어머님의 입에 넣어드렸다.하늘이 감동하였는지 어머니는 기적처럼 잠깐이나마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 후 수일이 지난 후, 어머니가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고, 강세호는 어머님의 장례를 고이 모신 후 80세가 되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어머님에 대한 애통함과 효성을 다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깊은 효심은 단순한 효의 범위를 넘어, 성인의 행동으로 칭송받을 만한 것이었다.
이후 강세호의 효행은 널리 알려졌고, 정산 유림 박승호 외 56명의 사람들이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당시 정산 군수 김현주에게 포상해 줄 것을 소청했다. 김현주 군주는 이 사실에 감탄하며, 이를 충청남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였고, 관찰사는 상부에 보고하여 포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생존한 손자와 증손들이 이 장한 조상의 행적을 정문으로 세워 덕을 기리려 노력하고 있다. 강세호의 행적은 우리 민족이 오랜 역사 속에서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삼아온 정신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으로, 우리는 다시금 그의 넋을 기리며, 효를 다하는 삶을 살 것을 명심하고, 그 정신을 이어나가야 한다.
※ 강세호 효행록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