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극선(趙克善, 1598~1658)의 본관은 한양,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이다. 아버지는 조경진(趙景璡),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이다. 조극선은 효심이 매우 깊은 선비였으며, 아버지께서 외출하여 돌아올 시간이 되면 항상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고 한다. 하루는 아버지 조경진이 친구 집에 놀러 가 밤늦게 귀가하려는데 비가 많이 내려 친구는 자고 가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서둘러 친구 집을 나와 급히 다리 앞으로 가니 조극선이 비를 맞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에 감동하여 조극선이 기다리는 다리에 ‘효자교(孝子橋)’라는 비석을 세웠다.
| 문화재 분야 | 유형문화 |
|---|---|
| 효문화 유형 | 가족사랑 |
| 시 대 | 조선 |
| 소 재 지 | 예산군 봉산면 시동길 31-20 |
| 참고문헌 | 현장 비문 |
자라서는 부모님을 봉양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머리카락과 손톱 등을 모으고 감추면서 “부모님이 주신 것이라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12살에 어머니가 사망했는데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가서 묘소를 정리했다. 아버지가 병에 들었을 때 회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시기가 맞지 않아 회를 구할 수 없었다. 이것이 통한이 되어 조극선은 죽을 때까지 회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묘소를 정리하는데 불이 나서 아버지 묘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조극선이 통곡을 하며 묘소로 가려고 하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불이 모두 꺼졌다고 한다. 1659년(효종 10)에 효자문이 건립되고 1666년(현종 7)에 명정 받았다.조정교(趙鼎敎, 1806~1874)의 자는 성삼(聖三), 호는 양심재(養心齋)로 조극선의 7세손이다.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에 정성을 다했다. 부모의 기일 때마다 마치 처음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슬퍼하였다. 또한 선산의 묘와 주위 나무들을 잘 정리하여 가문의 후세를 위해 노력했다. 1876년(고종13)에 명정을 받고 정려문이 세워졌다. 이때 조극선의 정려문을 합쳐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