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차명징(車命徵, 1644~1714)의 본관은 연안, 자는 기숙(起叔), 호는 연리(蓮里)다. 동생 차경징(車敬徵, 1662~1735)의 자는 공숙(恭叔), 호는 지천(芝川)이다. 1685년(숙종11)에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 어머니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형제 차명징과 차경징은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어머니 입에 흘러 넣어 회생하게 했다. 이것을 1686년(숙종 12), 1687년(숙종 13), 1690년(숙종 16) 동안 총 4차례에 걸쳐 계속 했다. 그러나 형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형제는 상을 당한 뒤 총 6년간 시묘를 하여 어머니의 묘 옆을 지켰다.
| 문화재 분야 | 유형문화 |
|---|---|
| 효문화 유형 | 가족사랑 |
| 시 대 | 조선 |
| 소 재 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서계양두련길 78 (서계양리) |
| 참고문헌 | 현장 비문 |
이들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746년(영조22)에 차경징의 정려가 세워졌고, 1751년(영조27)에 차명징의 정려가 세워졌다. 후에 후손들이 두 정려를 합쳐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정려 옆에 사는 11대손 차윤환씨의 증언에 의하면 “차씨 형제가 정성껏 시묘를 하며 물이 없어 고생하는데, 하늘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주변에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얘기를 전한다. 이런 효자를 낳은 마을이라 그런지 서계양1리 마을회관에는 ‘효도시범마을’이라는 명패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