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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화연구

전라남도 함평군, 조열승의 효행 실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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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열승(曺說承)은 부모를 봉양하고 장사지내는 데에 지극한 효가 있었다. 조열승의 자는 인집(仁集)이고 호는 기제(箕齊)이며 관직은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아버지는 조석근(曺錫根)이다. 조열승은 조선 순조 때에 태어나 타고난 성품이 인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며 일찍부터 학업의 성취가 있었다. 행실은 효성과 공경이 두터워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문 화 재 분 야
유형문화
효 문 화 유 형
부모공경(봉양형, 시묘형, 희생형), 나라사랑(시묘형)
시 대
조선 후기
소 재 지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수호리 652-1
참 고 문 헌

현장 비문

부모를 섬김에 있어 부지런히 부모의 뜻과 몸을 정성껏 봉양하였다. 집안 살림이 가난하였는데 두 부모가 병을 얻게 되어 차례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7~8개월 동안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병간호에 힘썼다. 조열승은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고 얼굴빛은 어두웠다. 부모에게 약과 죽을 마시게 하였고 부모의 대소변을 직접 스스로 맡아 받아냈으며 반듯이 일어나고 눕는 것을 도왔다. 하늘에 기도하고, 때로는 대변을 맛보기도 하고, 배에서 피를 내어 드리기도 하면서, 부모의 병이 낫기를 바라며 백방으로 힘을 썼지만 끝내 효과를 보지 못하고 부모의 상을 치르게 되었다. 슬픈 마음이 극에 달하여 피눈물을 흘렸으며, 무덤에 절을 하여 무릎이 닿은 곳에 웅덩이가 생겼다고 한다. 6년 동안 무덤 곁을 지키는 여막 생활을 했으며, 그 사이에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기도 하고 소나무가 스스로 말라가는 이상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조열승은 1834년(순조 34)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을 쌓고 “마음에 한이 없고자 한다.”라고 말하며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울면서 3년동안 소복을 입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충을 겸했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조열승은 52세에 세상을 떠났다. 1875년(고종 12)에 조열승의 아들이 마을에 한 효행각을 세우고 이 일로 인하여 규장각 직학사 민경식(閔景植)에게 글을 청하여 비문의 글을 완성하였다. 현재의 비는 1962년 추석에 자손들이 재건한 것이다. 증손 조기준(曺基濬), 조기상(曺基相)과 현손 조국현(曺國鉉), 조하현(曺河鉉), 조준현(曺準鉉)이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