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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화연구

충청북도 진천군, 유희원 정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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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원(柳希源, 1769 ∼ ?)은 1769년 문화 유씨 의직(義直)의 손자로 문백면 파재에서 출생하였다. 재주가 뛰어나 17세에 모든 경서에 능통하여 과거 공부를 시작하였다. 과거를 준비하던 중, 아버지 유사범(柳師範)이 병석에 눕게 되어 포기하고 병간호와 부모 봉양에 힘쓰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병환은 점점 나빠져 사방에서 약을 구해 왔지만 별다른 효험이 없었다.

문 화 재 분 야
유형문화
효 문 화 유 형
부모공경(봉양형, 희생형, 시묘형), 가족사랑
시 대
조선시대
소 재 지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39
참 고 문 헌

『문화유적총람』, 『내 고향의 향기』, 『진천군지』
『진천군의 문화유적』, 『문화유적분포지도』

어느 날 밤 유희원의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너의 효성이 지극하여 약방문을 주겠노라. 아비의 병에는 잉어를 먹어야 한다. 엄동설한이나 소두머니(지명)에 나가 지성으로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리면 잉어를 구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유희원은 재빨리 소두머니로 나갔다. 소두머니는 가까운 곳에 있는 강어귀였다. 다음 날 아침, 가족들은 유희원이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어 찾아 나섰다. 한참을 헤매다 소두머니의 꽁꽁 얼어붙은 얼음 위에 꿇어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유희원을 발견하였다.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가길 권하였으나 소용이 없어 임시방편으로 짚으로 움막을 지어주었다. 유희원이 얼음 위 움막에서 지낸 지 13일이 되는 날 저녁, 얼음이 얇은 곳에서 갑자기 잉어 3마리가 튀어나왔다. 유희원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두 마리는 강에 놓아주고 한 마리만 소중히 들고 집으로 왔다. 정성으로 잉어를 고아 약으로 올리니 아버지는 꿈속 노인의 말대로 씻은 듯이 완쾌되었다.

이후로 이웃 동네까지 이 이야기가 퍼져 유희원의 효성은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지는 않았다. 어느 날 진천으로 어사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평소 유희원을 시기하던 사람이 불효막심한 자라는 글을 어사에 올렸다. 당시 불효는 큰 죄로 다스려져 심한 벌을 받던 때였다. 어사는 며칠 동안 파재 근방에 묵으며 유희원에 대한 평을 남몰래 수집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효자라 칭찬을 할 뿐 불효와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아버지 병환이 위중하게 되자 허벅지를 찔러 피를 받아 아버지에게 수혈을 하여 병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어사는 모함이라는 것을 밝혀 엄하게 다스린 뒤 서울로 올라가 유희원의 효행을 임금에 고했다. 임금은 상을 내려 유희원에 벼슬을 권하였지만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며 사양하였다.

유희원은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면서 시묘(侍墓)를 살았다. 아침저녁으로 산소 앞에서 곡을 하는 모습에 이웃 사람들까지 슬프게 하였다. 3년 시묘가 끝난 후 눈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지성껏 봉양하였으나 어떤 약에도 낫지 않아 그만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실명한 어머니를 위해 불편해하시지 않도록 방을 따로 만들어 드렸다. 식사 때가 되면 일일이 시중을 들고 청결을 유지하도록 온갖 정성을 다했다. 비록 앞을 보지 못했지만 유희원의 지극한 돌봄과 효성으로 어머니는 장수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유림들이 효자문을 건립할 것을 관찰사(觀察使, 지금의 도지사)에게 글을 올려, 1846년(헌종 12) 효자 정문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