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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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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공경(봉양형, 시묘형), 가족사랑(절개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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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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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성산면 성연로 258 (보광리 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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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비문, 『증수 임영지(臨瀛誌)』, 『강원도지』 『춘천백년사』(춘천시, 1996년) |
김의진의 본관은 강릉이다. 어머니 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할 때, 집에 홀로 계신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묘소까지 왕래를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한겨울에 폭설이 내려 묘소로 가는 길이 막혔다. 이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눈을 헤쳐 길을 내 주었다고 한다. 조정에서 이런
효행을 알고 대효(大孝)라 해서 효천(孝薦)으로 동몽교관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김연범은 효자 김의진(金義鎭)의 현손이고, 보진재(葆眞齋) 김담(金譚)의 후손이다. 증광초시(增廣初試)에 응시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자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였다. 여섯 살 때에 참새를 쫓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짓기를 “넓은 들 곳곳에 새 쫓는 소리, 천년을 한결같이 신농(神農)을
배웠네.”라 하였다. 8세에 제초(除草)하는 것을 보고는 “효심이 먼저 일어나니 우선 묘정에 풀을 없애야겠네.”라 하였다. 아홉 살 때 서울에 가 있는
족숙(族叔)을 기다리며 시를 짓기를 “장안이 어느 곳에 있는가, 날마다 제성(帝城) 주변을 바라보았네.”라 하였다. 신동으로서 크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겨우 20세에 요절하여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삼척 심씨도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결혼해서는 지아비에게 순종하며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남편이 병이나 자리에 눕자 온각 약을 구해
치료하려고 힘썼으나 결국 세상을 뜨자 하루도 빠짐없이 시묘하며 세수도 빗질도 안하고 좋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치고 절개를 지키면서
시부모를 더욱 정성스레 모시고 봉제사를 위해 친척 가운데 한 아이를 입양하여 집안의 대를 잇도록 자식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런 심씨를 본
이들이 열부라 칭송하여 소문이 자자했고, 보첩에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들 세 명의 효자, 효열을 기리는 비석은 2004년 강원도와 강릉김씨 집안에서 세웠다.